DATE: 2011.01.09

DISTANCE: 76.02km(533.4km)

DEPARTURE: Merida

ARRIVAL: Kantuil

 크고 아름답지만 어쩐지 너무 말쑥해서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았던 메리다. 꿀맛 같은 휴식을 뒤로 하고 다시 우리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멕시코 시골에는 우리가 주행을 시작하는 이른 아침에 여는 식당이나 편의점이 없어 전날 미리 아침거리를 사두곤 했는데 대도시 메리다 에서는 편의점에서 손쉽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이제 가는 길 내내 제법 큰 도시가 이어질 테니 앞으로도 비슷할 것 같다.

메리다는 멕시코에서 보기 드물게 크고 말쑥한 도시다. 메리다를 떠나는 팀원들의 모습.

하지만 조금만 벗어나자 금방 낡고 소박한 여느 시골과 비슷해졌다.

 평소보다 꽤 늦은 9시가 되어서야 주행을 시작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요일의 아침의 메리다에서 흰 자전거를 타고 촐랑거리며 달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 게 천둥 벌거숭이가 된 기분이다. 워낙 큰 도시라 외곽으로 빠져나오는 데에만 10km를 달려야 했다. 그렇게 번화하고 유럽풍이었던 메리다인데도 외곽에는 곧바로 시골풍의 풍경이 펼쳐진다. 조금 가다보니 드디어 멕시코에서 우리의 목적지인 대표적인 멕시코 휴양도시 깐꾼(Cancun)이 표지판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희망에 들뜨기 시작한다.

 너무나 매서운 바람이 분 날.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기쁜 것도 잠시, 역풍이 심하게 불기 시작한다. 이렇게나 매섭고 강한 바람은 멕시코 여행 내내 처음인데 하필 또 역풍이라니. 주위에 바람을 막아줄 것이 없는 황량한 길이라 더욱 힘들었다. 순풍이 항해에 필수적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지만 자전거를 타는 데도 바람은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는 평소에 시속 18-20km로 달리는데 바람이 부니 12-15km로 속도가 확 떨어졌다. 밟는 만큼 나가지를 않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온몸으로 바람을 헤쳐나가는 건 굉장히 힘들다. 남자 팀원들이 번갈아 가며 선두를 자처한다. 이런 날 앞에서 달리는 건 정말 힘든데... 그 뒤로 따라가면 바람을 많이 피할 수 있어 필사적으로 딱 붙어간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는 목적지까지 가기 힘들 것 같아 불안해 진다.

 곤란하게도 내일은 유카탄주의 핵심 코스 중 하나인 유적 치첸 잇사를 보는 날이다. 지난번의 우쉬말도 제대로 못 봤는데 내일 만큼은 제대로 여유롭게 보고 싶은 마음에 다들 바람이 야속했다. 다행히 조금 지나자 바람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고개를 들어 표지판을 본다... 이제 깐꾼은 300km 남았다.

 이날 점심을 먹기 위해 원래 길에서 살짝 벗어나 TAHMEK이라는 마을에 들어선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매우 특별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TAHMEK은 인구 3000명인 정말 작은 마을이다. 보통 어느 마을에 가도 사람들이 빵만 먹고 살지는 않듯 중심가에는 식당이 꼭 있는데 여기는 정말이지...식당이 없다! 친절한 동네 어르신들께 여쭤보니 저쪽 구석에 마을의 유일한 식당이 있다고 하셨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아이가 도와줘서 겨우 도착했는데 이미 오늘 준비한 음식은 다 팔렸단다. 우리가 난감해하니 가게 주인이 바로 근처에 먹을 것을 파는 곳이 있다고 귀뜸한다.

 일반 가정집의 앞 쪽을 터서 음식을 포장해 파는 집이었다. 이 지역 전통옷을 입은 풍채좋은 할머니가 열심히 닭을 굽고 계신다. 동네 사람들은 닭구이를 싸와서 집에서 먹으니 음식점이라기 보다는 테이크아웃 가게이지만 다행히 협소한 테이블이 몇 개 있어서 앉아서 먹을 수도 있었다. 소박하고 낡은 집과 오래된 그릴이 정겹다. 왠지 집 뒤쪽에서 닭은 직접 키울 것 같은 곳이다. 편안하고 소박한 식사에 고생으로 날카로워진 마음이 누그러든다.

 안쪽 가게에서는 과일도 판매한다. 직접 키우신단다. 오렌지 하나에 1페소(100원). 맛이나 보라며 과일 몇 개를 내어주신다. 멕시코가 위험할 거라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맞다. 확실히 위험하다. 그래도 시골 인심은 정말 좋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과도한 상술을 쓰거나 적대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해웅을 보며 웃는 이 집 손녀딸, 해웅, 할아버지, 할머니

화려한 꽃 수의 저 흰 원피스는 유카탄 주의 전통 의상이다. 시골일수록 많이 보이며, 할머니, 아주머니 들이 많이 입으신다.

 스페인어 능통자인 명진언니와 애기를 좋아하는 이주, 해웅이의 활약으로 한참이나 할머니네 가족과 함께 놀았다. 그런데 가족들끼리는 명진언니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단다. 바로 마야어였다. 특별한 인연이다 싶어 두현 오빠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명진 언니가 스페인어로 통역하고 해웅이가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쑥쓰러워 하시면서도 흔쾌히 허락하신다.

 할머니의 성함은 Roberta Cantun(로베르따 깐뚠), 연세는 올해로 64세였다. 로베르따 할머니 말씀으로는 마야어는 유카탄 반도에서 준 공용어로 쓰이며 많은 사람들이 마야어를 알고 있다. 특히 시골에서는 여전히 많이 쓴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학교에서 마야어를 가르친다. 하지만 아무래도 대도시에서는 그닥 쓰이지 않는다. 할머니와 가족들의 얼굴에서 은은한 자부심이 베어난다. 치첸 잇사 근처의 마을이어서인지, 마야의 후손들이 아직도 그들과 비슷한 생김새로 태어나 마야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마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이렇게 건재하다. 새삼스러운 경외감이 들었다. 옆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신이 나서 마야어 잡지를 들고 오셨다. 도저히 어떻게 읽는지 알 수가 없는 언어였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할머니는 밝고 서글서글한 해웅이를 맘에 들어 하시며 깐꾼이나 한국에 가지 말고 여기서 자기와 함께 닭을 굽자고 하셨다. 넉살좋은 해웅이는 10년 뒤 돌아와 지금 열다섯 살 먹은 이 집 손녀딸과 결혼 하겠다는 익살을 부린다. 손녀딸도 해웅이 마음에 들었는지 애교스러운 장난을 친다.

 
다같이 한 장. 마야의 후손인 이들의 생김새는 어쩐지 우리들과 비슷했다.

 
멕시코에서는 '남자들 하고만'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종종 있었다.

감사의 의미로 특별히 힘이 넘쳐나는 듯한 제스'를 취하기로 결정한 우리 남성 팀원들.

2시간 후에 우려와 달리 목적지 Kantunil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일 치첸 잇사는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슬슬 해가 지는데 텐트 칠 곳을 찾다 갑자기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 여기 성당에 가서 텐트를 치게 해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마당에 텐트를 치면 화장실도 쓸 수 있을 테고 바람도 많이 막아줄 것이다. 성당에서는 우리의 우려가 우스울 정도로 흔쾌히 허락했다. 거기에 저녁 먹을 곳이 없을 거라며 자신들의 저녁거리로 만들고 있던 따꼬 비슷한 튀김 요리를 굉장히 싼 값에 주겠다고 했다. 횡재다!

 
튀긴 또르띠야에 닭고기, 팥죽과 비슷한 프리솔, 닭고기 등을 곁들인 요리. 붉은 것은 양파. 이름은 '고르다' 정도 되는 것 같다.

멕시코 요리가 맛있기는 하지만 사실 다 좀 비슷하다.

 
 다행히 삼면은 벽으로 둘러쌓은 곳에 텐트를 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알겠지만 우리 텐트는 매우 작았다. 텐트 하나에 3명이 잔다.

밤이 되니 이젠 춥다기 보단 시원하다 .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마을 축구장에서 경기를 구경하고 다시 돌아왔다. 내일은 치첸 잇사다. 지난번 우쉬말에서 많이 아쉬워했던 역사 조사 담당이었던 해웅이와 명진언니가 책을 보며 도란도란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동네 축구. 멕시코 사람들은 축구를 정말 즐긴다.

오늘의 주행 : Merida→Kantunil 76.02km

- 14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