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1년 1월 12일

출발지: 바야돌리드(Valladolid)

도착지: 뚤룸(Tulum)

주행거리: 106.83km(총 745km)
 
정말이지 정신없는 하루였다.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따르고 또 그게 계속 왔다 갔다하는  하루. 이름하야 롤러코스터의 날.
 
 
 

 

1. 멕시코 주행이 얼마 안남았다. 깐꾼에서 쿠바로 비행기타고 가기위해 여유롭게 준비해야 한다. 오늘 이틀치 주행을 하기로 했다. 110km나 된다.
하루 평균 50~60 km 정도 달린걸 생각해보면 상당히 긴 거리다. 여행 전체에서 가장 긴 거리일거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지. 열심히 달리기 위해 어제 미리 초코바를 스무개나 사두었다.
 
일찍 일어나서 달려야 한다. 아침 5시 반에 기상했다. 아침은 이젠 버릇처럼 옥소. 매운고추와 나쵸소스를 듬뿍 뿌려 핫도그를 먹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런데 아뿔싸...
 
 

갑작스런 비. 그것도 하늘이 뚫린 것 같은 비.

핫도그 먹으러 들어갈 때만 해도 날씨가 괜찮았는데 갑자기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다들 밥먹다 말고 뛰어나와서 자전거에 널어둔(-ㅅ-) 빨래를 걷는다. 밤새 열심히 손빨래한 옷이 순식간에 비에 젖어버렸다.
그나저나 참 큰일이다. 이제 주행 시작인데 비가 이렇게 많이 오다니...
 

 

어제 쎄노테에 남자애들 빠뜨려서 챡 신(비의 신) 이 노한게 틀림없다_이주

 

그래도 별 수 있나, 달려야지. 안달리면 비행기를 놓칠 지경이다. 안그래도 시간 부족해서 오늘 이틀치 달리기로 한거다.
똑같이 달려야만 한다. 우의가 없어도, 옷이 방수가 안 되어도.
 
 

 
 

이미 알고는 있지만 두려웠던 100km........ 게다가 비까지 하루종일 온다..

길이 미끄러워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하루종일 자전거를 탄다_명진 

2. 빗속에서 정말이지 정신없이 달렸다. 그나마   다행인건 번화가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급정거할 일이 없었고, 그래서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옷이 방수가 되지 않는 몇명이 힘들어했다. 쏟아지는 비 속에서 젖은 옷은 입고 모자도 우의도 없이 달리는 고통이 어련하랴.
본인의 준비성 부족을 탓할 수밖에...
 
점심 먹을 즈음에는 마땅히 식당이 없을 것 같아 체마쉬(Chemax)라는 작은 마을에 잠깐 들른다.
비오는 날이라 음식점도 안할 줄 알았는데 빗 속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는 집이 보인다. 기막힌 냄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통닭이 눈에 쏙 들어왔다. 밥시간이 아닌데도 당장 다리 하나 물어뜯고 싶을만큼 맛나게 생겼다.
한마리씩 주황색 봉투에 담아서 싸준다. 페니어 위에 단단히 고정한다.
소중한 통닭이 혹시 한쪽으로 쏠리거나 떨어질까봐 항상 뒷사람이 체크하기로 진지하게 약속한다.
힘들수록 밥은 진짜진짜 중요하다. 진짜.
 
한참을 달린 후에 이제 슬슬 비가 그친다. 공터가 나와서 밥을 먹기로 한다.
 

 
노릇노릇한 치킨과 양배추, 볶은 밥, 할라피뇨가 같이 들어있다. 또르띠야를 숫가락 삼아 닦아 먹는다. 날씨가 조금씩 개는 것 같다.
 
 

우리는 그 닭 세 마리를 포장해서 가는 길에 먹었다. 그냥 흙바닥에 앉아서 닭을 뜯어 먹었다. 나는 뭔가를 먹을 때, 주위에 동물이 있으면 식욕이 떨어져 잘 먹지 않는다. 중국에서 식사를 하는데, 고양이가 발밑에 왔다 갔다 해서 그냥 밥을 안 먹어 버린 적도 있다. 흙바닥에서 닭을 먹고 있는데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는 식욕이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왕성해졌다. 어쩜 그렇게 맛있던지, 먹는 것에 완전히 몰입했던 거 같다 _해웅

 

 

멕시코 편의점의 커피나 쉐이크 같은 음료는 컵으로 일단 사서 (컵 크기도 다양)먹는 사람이 알아서 컵을 채워 마신다. 여기서 놀라운 점 하나. 밀크쉐이크에 얹어먹으라고 초코시럽, 팝핑 캔디, 오레오 쿠키, 초코칩 등 다양한 토핑이 마련되어 있다(핫도그조차 취향따라 알아서 만들어 먹도록 되어있는 나라 답다)! 보통의 멕시코 사람은 그런 것을 슬쩍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한다. 아침에 옥소에서 챙겨온 것. 닭고기 먹고 나서 입가심으로 맛나게 먹었다.

 

 
 
3. 주행 거리가 길어서인지 한동안 없던 펑크가 두번이나 터졌다. 명진언니는 아까 마을 근처에서 돌을 밟은 것 같다고 했다.
 이주 언니는 한참 달리다 거대한 유리조각을 밟았다고 한다. 종석이 때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펑크나고 나서 5초 만에 바람 빠지는 게 눈으로 보일 만큼 크게 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둘 다 비가 좀 그치고 나서 사건이 터진거라고나 할까.
 
4. 비가 왔다 갔다 계속된다...멀리서 먹구름이 보인다. 옷이 젖어서 찝찝한 게 미칠 것 같다. 가방 안의 옷도 이미 다 젖었겠지. 갈아입을 옷도 없을 것 같다. 일기장이 젖지는 않았을까 걱정도 된다. 안경을 쓰는 팀원들은 시야가 가려서 불안해 한다.
 

비가오니 무릎이 더 아파져서 눈물나게 힘들었는데 다들 빨리가서 미안하고 민망하면서  원망스러웠다_지민

중간 중간에 잠시 쉬며 힘을 회복한다.

초코바도 먹고 수다도 떤다. 카메라 고장날까봐 사진찍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렇게까지는 춥지않다는 거다.

 

 

 

5.  목적지인 Tulum(뚤룸)에 도착하고나니 저녁이다. 캠핑-캠핑-숙소 생활을 반복하는 우리 숙박 패턴으로 봤을때 오늘은 캠핑할 차례. 하지만 비를 엄청나게 맞은 지금 캠핑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안든다. 따뜻한 물에 씻고싶을 뿐. 게다가 밤이라 그런지 바람이 엄청나게 심하다.
 

  

 

낮 주행 동안 지친 팀원들의 모습
 
하지만 바닷가 관광지인 이곳 뚤룸에서 방 값은 엄청나게 비싸다. 다들 수소문해서 제일 싼 곳을 찾아보아도 6명에 800페소나 한다.
보통은 비싸도 600 페소고 메리다에서는 480 페소였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만 텐트에서 자자는 말이 슬금슬금 나온다. 대신 오늘도 성당 마당에서 자면 될 테니까.
성당 앞뜰에서 막 텐트를 다 쳤을 무렵 이주가 어디론가 사라진다.
 
막 텐트에 들어가 쉬려고 하는데 미사를 마친 신도들이 우리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왜 여기서 이러는지도 궁금할 만 하다.
신세지는 입장인 만큼 예의바르게 대답한다. 혹시나 쫓아내려 할까 걱정도 조금 하면서.
 
그런데 아니타 씨라는 프랑스 여배우 줄리엣 비노슈를 닮은 기품있는 여성이 큼직한 열쇠를 꺼내더니 안쪽으로 따라오란다.
문을 여니 소박하지만 아늑하고 잘 정리된 방이었다.
사제관이다.
 
"우리 신부님이 지금 깐꾼에 계시긴 하지만 너희들이 이 추운 날 밖에서 자도록 내버려두실 분은 아니란다. 이 곳을 쓰도록 해."
 
그 때의 감사와 감동은 정말이지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놀랍게도 다른 분들도 모두 그러한 친절이 당연한 것인양 찬성하셨다.
대부분의 멕시코 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카톨릭이고 멕시코 모든 마을과 도시의 중심은 성당이다.
 

멕시코 모든 도시에는 쏘깔로(Zocalo)라고 하는 중앙광장과 그 과장을 둘러싼 주청사 건물, 성당이 함께 있다. 그냥 그려려니 항상 보는 성당이다. 근데 문득 일본여행때 만난 자전거 여행자가 생각났는데 기독교 신자라서 텐트도 없이 교회에 부탁해 침낭만 가지고 잠을 잔다고 했던말이 기억이 났고 메리다 다음 목적지에서 처음 성당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도 시도를 했다_명진

하지만 우리에게 멕시코의 카톨릭과 성당은 위엄이나 경외심보다는 이날의 따뜻한 친절로 기억된다.
 

 
6. 다른 팀원들은 마르께시타를 먹으며 수다를 떠는데 이주가 돌아오지 않는다.

마르께시타는 즉석에서 구워주는 바삭한 과자다. 속재료로 하나 또는 두개를 고를 수 있다.

치즈, 딸기맛 시럽, 초코맛 시럽, 까헤타, 누뗄라 등.

보통은 짭짤한 치즈와 달콤한 소스를 하나 고른다.짜면서도 달콤한 맛의 조화가 재밌다.

 
이주는 성당 마당에 텐트를 칠때 사라졌으니 우리가 사제관에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돌아왔을 때 텐트도 자전거도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면 놀라지 않을까?
그렇지만 밖에서 기다리기에는 너무 바람이 많이 불고 어둡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자전거 라이트 하나를 켜서 창틀 옆에 뒀지만 나무와 풀이 무성한 마당에서는 우리가 안보일 것 같다.
 
두현이 슬슬 화를 내기 시작한다. 팀 전체를 이끌어가는 팀장으로서 두현은 이런 돌발적인 개인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고 자주 말했다.
이런 밤 중에 이주가 혼자 사라지니 단단히 화가났다. 아니타씨 같은 사람도 있지만 밤에 여자 혼자 다니기에 멕시코는 너무 위험하다. 
 
그러다 이주가 돌아왔다. 다행히도 우리가 사제관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단다.
어리둥절한 이주를 붙잡고 두현이 차분하게 화를 내기 시작한다.
 
이내 이주의 눈이 살짝 젖기 시작한다.
 

  
운동화에 양말까지 신고 빗속을 달리는 건 분명 찝찝할 거다
 
이때까지 슬리퍼나 샌들이 없어서 계속 운동화를 신고 주행을 했는데 오늘 비가 오니 너무 힘들어서 신을 사고 싶었단다.
관광을 하는 도시가 아니라 지금 밖에 시간이 없었고 주행이 끝난 후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고 말한다.
고성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가족이 보고싶다는 말과, 비행기를 타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게 낫겠다는 말이 설핏 들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이주가 멋대로 이탈을 해버렸다. 신발을 사러 갔단다.

집이 그립다고 우는데 어린 아이도 아니고 무슨 행동인가_두현

모든게 엉망진창이었다...
두현이가 제일 싫어하는 개인행동을 했다.
생각해보니 개인행동을 제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신발을 사러 갔다.
나도 나름대로 신발땜에 짜증이 난건데 이 나쁜놈이 나보고 뱅기타고 집에 가란다.....
나 지금 쫌 많이 충격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되지?
진짜 집에 가야되나 싶다ㅠㅠ
아....손이 떨려 힘이 없다.
난 충분히 내 문제를 애들한테 얘기한것 같은데 아닌가보다.
내문제는 첫째가 엄마아빠가 보고싶다는 거고
둘째가 신발 신발 신발 이었다
휴..........무지 쪽팔리고 울트라 초특급 우울하고 왕왕왕짜증나고 미치도록 화가나고 욕나오는 밤이다_이주

여행 내내 충돌이 없었던 우리팀인데...
빗속 주행으로 시작된 하루가 화가 난 두현과 우는 이주와 말 없는 나머지 넷의 모습으로 마무리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대로 둘이 아주 틀어져 버리면 어쩌나...
내일 주행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오늘의 주행: Valladolid→Tulum 106.83km

- 17화 끝 -